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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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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사랑의 변주곡 사랑의 變奏曲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사그러져가는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강이 흐르고 그 강건너에 사랑하는암흑이 있고 삼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기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열렬하다間斷도 사랑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암..
신동엽, 4월은 갈아엎는 달 4월은 갈아엎는 달 신동엽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 넣고 있을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것들.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산천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4월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우리네 조국에도 어느 머언 심저, 분명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4월이 오면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광화문서 목 터진 4월의 승리여.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이 균스러운 부패와 향락의 불야성 갈아엎었으면갈아엎은 한강연안에다 보리를 뿌리면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그날..
김남주,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김남주 서른에서 마흔몇 살까지황금의 내 청춘은 패배와 투옥의 긴 터널이었다이에 나는 불만이 없다자본과의 싸움에서 내가 이겨금방 이겨혁명의 과일을 따먹으리라고는꿈에도 생시에도 상상한 적 없었고살아 남아 다시 고향에 돌아가어머니와 함께 밥상을 대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나 또한 혁명의 길에서옛 싸움터의 전사들처럼 가게 될 것이라고그쯤 다짐했던 것이다 혁명은 패배로 끝나고 조직도 파괴되고나는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 부끄럽다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징역만 잔뜩 살았으니이것이 나의 불만이다그러나 아무튼 나는 싸웠다! 잘 싸웠거나 못 싸웠거나승리 아니면 죽음!양자택일만이 허용되는 해방투쟁의 최전선에서자유의 적과 싸웠다 압제와노동의 적과 싸웠다 자본과펜을 들고 싸웠다 칼을 들고 싸웠다무기가 될 수..
김광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 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