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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우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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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서 우..
송경동, 교조 교조 나는 이제 당신에게내가 느낀 그 어떤 것도솔직하게 말하고 싶지 않아요문득문득 나도 양지가 그리웠다는 이야기를간혹 엉망으로 무너지고 싶을 때 많았다는 이야기를당신에게 해주기 싫어요당신이 얼마나 깨끗한 영혼인지 증명하기 위해내가 얼마나 병든 영혼인지를 내보이고 싶지 않아요모든 게 다 이해되고모든 게 다 해석되는 당신에게그 무엇도 모르겠는 이 답답함을더는 상의하고 싶지 않아요그 모든 고백이 당신 가슴께로 가지 않고차디찬 머리로 갈 거니까요당신은 친구의 말을 진술로 받아들이죠친구의 눈물을혐의로 받아들이죠당신은 하나의 틀만 가지고 있는데내 열망과 상처는 수천만갈래여서이제 당신에게 다가갈 수 없군요 출처: 송경동 시집 창비 2016, 74~75쪽.
송경동,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2014년 1월 2일 캄보디아 프놈펜 남서쪽 카나디아 공단 한국계 기업 '약진통상' 정문 앞 봉제노동자 백여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최저임금을 올려달라고 127개 공장이 파업 중이었다 공단 내 다른 한국 기업인 '인터내셔널 패션로얄' 노동자 피룬도 춤을 추고 있었다 하루 평균 열시간 일하며부자를 위해 비싼 옷을 만든다는 피룬의 월수입은 130달러, 한화로 14만원한시간 잔업수당 50센트 의료수당 5달러아침 7시 출근을 한번이라도 어기면 나오지 않는보너스 5달러 교통비 5달러를 포함해서다 "나도 '꿈'이란 것을 가져보고 싶다"서른한살 여공 파비도 댄싱 파업에 참가한 까닭이었다네댓 명이 함께 사는 쪽방 월세가 40달러식비 60달러 십년을 일했지만 남은 건 200..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내 가슴이 꽉 메..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
백석, 수라 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이 193..
임화, 9월 12일 九月 十二日 一九四五年, 또 다시 네거리에서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ㅅ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窓도 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鐘路ㅅ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 마냥 뫄여드는 千萬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는 旗ㅅ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 임화, 본명은 林仁植,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