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백기완
맨 첫발
딱 한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 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중심이 안 잡히나니
그 한발 떼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아니 그 한발 떼기에 언땅을 들어올리고
또 한발 떼기에 맨바닥을 들어올려
저 살인마의 틀거리를 몽창 들어엎어라
들었다간 엎고 또 들었다간 또 엎고
신바람이 미치게 몰아쳐오면
젊은 춤꾼이여
자네의 발끝으로 자네 한몸만
맴돌자 함이 아닐세 그려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저 썩어 문드러진 하늘과 땅을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려라
돌고 돌다 오라가 감겨오면
한사위로 제끼고
돌고 돌다 죽음의 살이 맺혀오면
또 한사위로 제끼다 쓰러진들
네가 묻힐 한 줌의 땅이 어디 있으랴
꽃상여가 어디 있고
마주재비도 못 타보고 썩은 멍석에 말려
산고랑 아무데나 내다 버려지려니
그렇다고 해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거라
팔다리는 들개가 뜯어가고
배알은 여우가 뜯어가고
나머지 살점은 말똥가리가 뜯어가고
뎅그렁 원한만 남는 해골바가지
그리되면 띠루띠루 구성진 달구질 소리도
자네를 떠난다네
눈보라만 거세게 세상의 사기꾼
정치꾼들은 모두 자네를 떠난다네
다만 새벽녘 깡추위에 견디다 못한
참나무 얼어터지는 소리
쩡쩡, 그대 등때기 가르는 소리가 있을지니
그 소리는 천상
죽은 자에게도 다시 내려치는
주인 놈의 모진 매질소리라
천추의 맺힌 원한이여
그것은 자네의 마지막 한의 언저리마저
죽이려는 가진 자들의 모진 채찍소리라
그 소리 장단에 맞춰 꿈틀대며 일어나시라
자네 한사람의 힘으로만 일어나라는 게 아닐세 그려
얼은 땅, 돌부리를 움켜쥐고 꿈틀대다
끝내 놈들의 채찍을 나꿔채
그 힘으로 일어나야 한다네
치켜뜬 눈매엔 군바리들이 꼬꾸라지고
힘껏 쥔 아귀엔 코배기들이 으스러지고
썽난 뿔은 벌겋게 방망이로 달아올라
그렇지 사뭇 시뻘건 그놈으로 달아올라
벗이여
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
꽹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
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
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
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벽
제국의 불야성을 몽창 쓸어안고 무너져라
무너져 피에 젖은 대지 위엔
먼저 간 투사들의 분에 겨운 사연들이
이슬처럼 맺히고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 들릴지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
세월은 흘러가도
굽이치는 강물은 안다
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일어나라 일어나라
소리치는 피맺힌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노래 소리 한번 드높지만
다시 폭풍은 몰아쳐
오라를 뿌리치면
다시 엉치를 짓모으고 그것도 안 되면
다시 손톱을 빼고 그것도 안 되면
그곳까지 언 무를 수셔 넣고
이런 악다구니가 대체 이 세상 어느놈의 짓인 줄 아나
바로 늑대라는 놈의 짓이지
사람 먹는 범 호랑이는 그래도
사람을 죽여서 잡아먹는데
사람을 산 채로 키워서 신경과 경락까지 뜯어먹는 건
바로 이 세상 남은 마지막 짐승 가진 자들의 짓이라
그 싸나운 발톱에 날개가 찢긴
매와 같은 춤꾼이여
바로 이때 가파른 벼랑에서 붙들었던
풀포기는 놓아야 한다네
빌붙어 목숨에 연연했던 노예의 몸짓
허튼춤이지 몸짓만 있고
춤이 없었던 몸부림이지
춤은 있으되 대가 없는 풀 죽은 살풀이지
그 모든 헛된 꿈을 어르는 찬사
한갓된 신명의 허울 따위는 여보게 그대 몸에
한 오라기도 챙기질 말아야 한다네
다만 저 거덜난 잿더미 속
자네의 맨 밑두리엔
우주의 깊이보다 더 위대한 노여움
꺼질 수 없는 사람의 목숨이 있을지니
바로 그 불꽃으로 하여 자기를 지피시라
그리하면 해진 버선 팅팅 부르튼 발끝에는
어느덧 민중의 넋이 유격병처럼 파고들고
부러졌던 허리춤에도 어느덧
민중의 피가 도둑처럼 기어들고
어깨짓은 버들가지 물이 오르듯
민중의 생기가 신바람이 일어
나간이 몸짓이지 그렇지 곧은목지 몸짓이지
여보게, 거 왜 알지 않는가
춤꾼은 원래가 자기 장단을 타고난다는 눈짓 말일세
저 싸우는 현장의 장단 소리에 맞추어
벗이여, 알통이 뻘떡이는
노동자의 팔뚝에 새내기처럼 안기시라
바로 거기선 자기를 놓아야 한다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비로소 한 춤꾼은 굽이치는 자기 춤을 얻나니
벗이여
비록 저 이름 없는 병사들이지만
그들과 함께 어깨를 껴
거대한 도리깨처럼
저 가진 자들의 거짓된 껍질을 털어라
이 세상 껍질을 털면서 자기를 털고
빠듯이 익어가는 알맹이, 해방의 세상
그렇지 바로 그것을 빚어내야 한다네
승리의 세계지
그렇지 지기는 누가 졌단 말인가
우리 쓰러져도 이기고 있는 노동자의 아우성
오, 우리 굿의 절정 맘판을 일으키시라
온몸으로 들이대는 자만이 맛보는
승리의 절정 맘판과의
짜릿한 교감의 주인공이여
저 폐허 위에 너무나 원통해
모두가 발을 구르는 저 폐허 위에
희대의 학살자를 몰아치는
몸부림의 극치 신바람을 일으키시라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네 허리 네 팔뚝으로 역사를 돌리다
마지막 심지까지 꼬꾸라진다 해도
언땅을 어영차 지고 일어서는
대지의 새싹 나네처럼
젊은 춤꾼이여
딱 한발 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198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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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진 님이 쓴 글을 옮겨 놓는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기완의 이 장시에서 가사를 따와 황석영이 개사하였고 광주지역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씨가 작곡하였다. 이 노래는 광주항쟁 때 시민군 대변인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전사한 윤상원과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 때 두 남녀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 형식으로 작곡되어 처음 선보였다. 이 둘은 1982년 5.18 묘역에 나란히 합장되어 완전한 부부의 연을 맺었고, 노래는 <넋풀이-빛의 결혼식>이란 음반에 수록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훗날 ‘민중의 영원한 애국가’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니면서 민중의 깨우침을 위한 서시로 널리 애창되었다.
이 시와 노래는 1980년대 초 광주항쟁의 패배감과 좌절감을 극복하고 승리의 의지와 투쟁적 역동성을 획득해낸 최초의 작품이라 하겠다. 광주항쟁 직후인 1981년에 광주항쟁은 '항쟁'으로서보다는 '대학살'로 다가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엄청난 죽음에 충격 받고 주체할 수 없는 패배감과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로서의 자괴감, 죄의식에 젖어 있었으며 이러한 패배감과 자괴감은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까지 진보적 지식인들 속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찍이 그 열패감과 자괴감을 올바르게 극복해냄으로써 1980년대 새로운 노래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이 시를 처음 쓸 당시를 회상한다. “그건 내가 입으로 쓴 시야. 입으로 웅얼대면서 감옥 천장에 눈으로 쓴 시야.” 유신잔재 청산을 거리에서 외치다가 1980년 서빙고 보안사에서 고문을 받을 때였다. 5·18 광주에서 시민들이 학살당할 때, 백 소장은 감옥에서 “이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돌려라. 나는 죽지만 산자여 따르라. 나는 죽지만 살아있는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고 절규하였다. “감옥에서 꼼짝없이 드러누운 채 입으로 웅얼거리며 새길 수밖에 없던 시” 그게 ‘묏비나리’였던 것이다. ‘비나리’는 '빈다'에서 파생된 말로서 손을 모두어 비는 행위를 일컫는다. ‘묏비나리’는 ‘우리 강산을 위한 기원’ 쯤의 의미가 되겠다.
5.18을 감옥에서 겪었으나 백기완의 이 ‘묏비나리’에는 시대의 아픔이 녹아있어 결국 5.18광주정신이 고스란히 스며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감옥에서 완성된 이 시가 작은 종이에 깨알만한 글씨로 적혀 사타구니에 숨겨져 있다가 비밀 유인물로 만들어서 돌렸던 게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가사의 원작자인 백기완은 1998년 “나는 이 노래에 대한 소유권도 저작권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미 이 땅에서 새 날을 기원하는 모든 민중의 소유가 됐기 때문이다.”라며 저작권 불행사 입장을 밝혔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가 한심한 이유로 잠시 규제를 받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다. 입을 틀어막는다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치욕의 역사가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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