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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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0월 남한의 종합월간지 <학풍> 창간호에 게재된 시다. 해방 후 북한에 있던 백석이 <학풍>에 보낸 것이라는 말도 있고, 남한에 있던 그의 친구 허준이 지니고 있던 시라는 말도 있다. 어쨌든 이 시는 남한에서 발표될 수 있었던, 백석이 남한에다 남긴 마지막 시가 되었다.

백석의 시들을 읽으면 사무치는 그리움이 한줌 잡티 없이 투명하게 우러나오는 것을 같이 따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움은 떠남에서 비롯된 것일 터. 한데, 이토록 아린 그리움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는 그가 왜 떠남의 길을 걸었을까? 동경에 유학까지 하고 신문기자, 교사 등으로 전혀 ‘헤매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그가, 문단의 최고미남으로 꼽히며 아리따운 여인들과도 곧잘 어울렸던 그가 왜 쓸쓸하게, 가난하게, 홀로 떠돌아다니는 '유목'의 삶을 선택했을까? 그의 삶에서, 그의 영혼에서 어떤 것이 있어 그를 계속 그립기만 한 길 위에 서있게 했을까?

그의 '유목'에는 친구도 환대도 없다. 그의 '유목'에는 낯선 것과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는 '사건'도 없다. 그의 '유목'에는 늘 낯설어 늘 새로운 인식도 없다. 그의 '유목'에는 오로지 한 곳, 두고 온 것에 대한 그리움이 숙명처럼 못박혀있다. 떠날수록 생생하게 깨어나는 것은 떠난 곳, 떠난 사람, 과거다. 그래서 그의 떠남은 오히려 과거를, 떠난 사람을, 떠난 곳을, 그리하여 그리움을, 정갈하게, 티 없이, 맑게, 만든다. 포스트모던 세상의 유행어인 '유목'과는 얼마나 다른 '떠돎'인가.

 

이 시에서도 “나”는 사랑하는 모든 사람, 모든 공간과 멀리 떨어져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자발적이거나 의식적인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어느 사이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기에 “슬픔”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자각이, “죽을 수밖에 없”다고 느낄 정도로 강력하게 일어나지만, 여기서 다시—이건 그의 시 여러 편에서 볼 수 있는 시적 구조인데--의식과 감정의 전환이 일어난다. 지금의 처지는 그저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에 따른 결과만은 아니라는 것, “내 뜻”과 “힘”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절망적 상황에서 자책하기와 운명으로 받아들이기의 다툼이 마음속에서 여러 날에 걸쳐 벌어지고, 마침내 마지막에 찾아오는 정조는, 다시, ‘외로움’이다. 

하지만 그 ‘외로움’이야말로 백석 스스로 소명으로 받아들인 자기 존재에 대한 규정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그는,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위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둠 속 홀로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으로, 그렇게 삶을 견디어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