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힌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陶淵明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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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백석이 만주에 체류했던 1941년 4월 <문장>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만주로 이주 한 시점을 1940년 1월로 보면, 만주에서 지낸 지 일 년이 약간 넘은 시점에 발표된 것이다. 이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별 헤는 밤」의 윤동주가 떠오른다. 아니나 다를까 백석의 시집 <사슴>을 윤동주가 '열독'했다고 한다. 시에서 백석은, 시에서 윤동주와 마찬가지로 쓸쓸하고, 높고, 고독하며, 또 맑다. 그런데 윤동주의 '맑음'이 동정의 청년이 간직하고 있는 그것과 같다면, 백석의 '맑음'은 숱한 좌절을 겪은 장년의 고된 영혼이 기적처럼 정갈하게 간직하고 있는 그런 것이다. 「별 헤는 밤」의 “별”과 이 시의 “흰 바람벽”, 그것도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만큼의 차이다. 그리고 이것이 백석의 시가 전하는 특별한 울림의 근거 중 하나일 것이다. / 이 시에서 직접 언표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와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은 백석의 자기 존재 규정이다. 그리고 그 ‘규정’(Bestimmung)은 시인으로서의 그에게 부과된, 아니 그가 시인으로서 스스로에게 부여한—독일어 ‘Bestimmung’의 또 다른 뜻인--‘사명’과도 같다. 그는 그렇게, 그 힘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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