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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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1936)에 수록된 작품이다. 백석의 시 중 감정이 가장 직접적으로 발설된 작품에 속한다. “새끼거미”의 처지에 자기 처지를 투사해서일까? 아니면 ‘동시’ 형식을 취해서일까? 어쨌든 이 시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한 “나”의 행위의 결과로 타 생명에게 일어나게 된 일련의 일에 대한 인식과 그에 따른 마음의 움직임이 그려지고 있다. "나"로 인해 빚어진 고통에 대한 인식은 타 생명("새끼거미")과의 자기 동일시로 이어지고, 이로부터 나오는 서러움과 슬픔의 정조로 표현된다. 영문학을 전공했고 충분히 ‘모던’한 감각을 지녔을 백석이, ‘모던’한 것과는 거리가 먼 시어와 소재와 정조를 붙잡았고, 그래서 오히려 정말 ‘모던’하게, 그래서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울림을 주는 시를 쓸 수 있었다면, 그 바탕에 놓여있는 것은 무엇일까? 겨우 거미 한 마리 방 밖에 버린 것을 ‘수라(修羅)’의 행위 또는 ‘수라’의 세계로 인식하는 것, 그렇게 느끼는 것. 그의 이러한 인식, 이러한 느낌에는 이런 유의 시들이 곧잘 노출하는 가식도 과잉도 없다. 그렇게 읽힌다. 이 힘, 그것은 무엇일까? 시가 궁극적으로 울림을 줄 수 있고, 공감을 얻을 수 있고, 한 순간이나마 읽는 이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서의 참된 진정성, 이런 게 그의 시에서는 느껴진다. 거짓과 꾸밈과 과시가 없는 세계. ‘진정성’이 과거의 유물이 되고 만 체제요 역사단계라 할지라도, 그 체제 속에서, 그러한 단계에서라도, 사람의 진심을 움직이는 힘들에는 여전히 진정성이 빠질 수 없지 않을까.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으로부터 잦아드는 몸의 ‘고통’만이 시의 언어로 연철성금(鍊鐵成金)한다”는 게 “천하의 이치”(유중하, 「하나에서 둘로: 김수영 그 이후」,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 46~7쪽)라면, 백석의 시는 그런 “천하의 이치”를 따른 것이며, 그건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참된 진정성에 정갈하게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백석은 그의 시로써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되고야 만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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