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月 十二日
一九四五年, 또 다시 네거리에서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ㅅ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窓도
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鐘路ㅅ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 마냥 뫄여드는
千萬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는 旗ㅅ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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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 본명은 林仁植, 190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임화 외에도 성아(星兒), DA林DA, 쌍수대인(雙樹台人), 김철우(金鐵友), 청로(靑爐), 임화(林華) 등이 있다.
그는 “신이 함께 한다”고 믿는 ‘청춘의 삶’을 산 사람이었다. 조숙한 소년의 도저한 낭만성, 그 낭만성이 혁명의 불꽃에 온몸을 던지게 했고, 급하게 절망케 했고, 폐병환자로 시름 앓게 했을 것이다. 해방과 전쟁의 포화 속에서 다시 불꽃으로 타올랐으나, 그의 아내(지하련), 애틋하게 아름다운 그녀를 끝내 미치게 만든 죽음으로 46년의 인생이 지워지는 삶을 산 사람, 노래로 영원히 기억되는 삶을 살기를 욕망했으나, 그가 몸 던진 바로 그곳에서 지금까지도 비(非)존재로 존재하는 그런 사람이 임화다.
“이 나라 현대문학사를 통틀어 헤겔적 의미에서 임화만큼 문제적인 인물은 많지 않다. 그는 제일급의 시인이자 비평가였고, 또한 실천가였다. 그보다 뛰어난 시인도 비평가도 실천가도 있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이 셋을 아울러 임화만큼 뜨겁게 온몸으로 살아간 사람은 따로 없다./ 선천적 감수성이 그로 하여금 시인으로 치닫게 했고 타고난 용모가 활동사진 배우로 나아가게 했지만, 그로 하여금 비평가로 치닫게 한 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였다. 그것은 계급혁명이라는, 20세기가 빚어낸 위대하고도 가장 비극적인 조건 한복판에 그가 섰음을 가리킴이다.”(<그들의 문학과 생애, 임화>, 김윤식 지음, 한길사, 2008, 6쪽)
하지만 그의 죽음은 진정한 비극이 되지 못한, 그래서 오히려 더 비극적인 것이었다. 생물학적 삶을 바침으로써 영원한 삶을 사는 것이 고전적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그런 주인공이고자 하는 욕망에 누구보다도 강렬히 들렸던 그는, 바로 그 ‘영원한 삶’의 이름으로 단죄 받았고, 그 명부에서 지워져버렸다.
1953년 8월 6일, 그는 “조선 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테러 및 선전 선동 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처형되었다. 2년 뒤인 1955년 12월에 있었던 박헌영 재판 때 증인으로 나왔고, 박헌영과 함께 처형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가 ‘미제의 스파이’였는지, 아니면 ‘해방전쟁’ 실패의 책임을 전가 받은 '순수한 희생양'이었을 뿐이었는지도 아직은 단언할 수 없다.
위에 올린 시 <九月 十二日>은 해방 후 임화가 처음 발표한 시다. 이 시를 두고 신경림은 “급박한 호흡, 짧은 가락, 높은 음조 속에 내장된 폭발력을 가지고 전투성과 선동성을 최고도로 끌어올려 선정선동시의 한 전범이 되고 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쉽게 동의하긴 어렵다.
1940년 전후, ‘파시즘’의 旭日昇天하는 氣運에 주눅 든 임화, “시민계급의 몰락을 인식하고 새로운 역사의 방향성으로 파시즘을 보고 만”(김윤식) 임화, 허탈감에 빠져 한갓 시인으로 또 평론가로 삶을 살고, 심지어는 일제에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던 임화, 그런 임화였기에 해방은 어쩌면 난감했을, 참으로 급작스러운 사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발 빠르게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1945년 8월 16일)하는데 주동이 되었던 임화, 1945년 12월 31일 봉황각 좌담회에서 일제치하 행위에 대해, “겸허하게 이 아무도 모르는 마음의 ‘비밀’을 솔직히 터 펴놓는 것으로 자기비판의 출발점을 삼아야 한다”고 발언했던 임화, 그 전에 ‘문학작품’으로써 먼저 참회하고 비로소 새로이 살아갈 결의를 다지는 시가 바로 이 시, <九月 十二日>이다.
“1945년 9월 12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주최로 미군환영시가행진이 있었다. 정오 무렵 서울운동장에서 시작된 이 집회는 광화문에 이르는 시내 행진이었다. 20여 단체로부터 나온 약 만 명의 사람들이 벌인 이 시위에서 우리가 넘길 수 없는 것은 조선인민공화국 수립과 조선공산당 재건을 축하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점이다.”(김재용)
이 무렵까지만 해도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과 미군정 사이에는 표면적인 대결이 없었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도를 연합군의 일원인 미국이 승인해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얼핏 보면 대립적인 성격의 시위가 공존할 수 있었던 것. <연표 한국현대사>에 “참여군중 1만 명, 조선공산당 재건 만세! 등의 플래카드와 9. 9에 죽은 연전 학생 유해를 메고 가두시위 감행”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면, 그저 조선인민공화국/조선공산당 쪽 “목소리도 있었”던 정도만은 아니었던 듯.
당시 약 90만 명이었던 서울 인구 중 무려 1만여 명이 몰려나온 거대한 가두행렬, 그 속에 선 ‘혁명적 낭만주의자’ 임화가 송두리째 압도당하지 않기란 쉽지 않았을 것. 한순간 새 세상이 바로 그의 눈앞에 닥친 듯 했으리라.
하지만 임화의 남다른 점은, 바로 그 자리에서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참회를 잊지 않았다는 것. “이러한 '부끄러운 기억'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읊은 시인은 임화밖에 없었다.”(김윤식) 스스로 용기를 낼 만큼 그는 뻔뻔할 수 없었기에 제발 용기를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임화, 이후 그는 더 이상 ‘한갓’ 시인이 아니라 다시, 정치의 격랑 속에서 펄떡이는 전사(戰士)가 된다.
쇼스타코비치가 “조선에도 이런 음악가가 있었는가?”라고 격찬한 김순남이 작곡한 노래, <인민항쟁가>(1946년)의 가사도 그런 ‘전사로서의 임화’가 지은 것일 터.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 밑에 전사를 맹서한 깃발
더운피 흘리며 말하던 동무
쟁쟁히 가슴속 울려 온-다
동무야 잘가거라 원한의 길을
복수의 끓은 피 용솟음 친다
백색테러에 쓰러진 동무
원수를 찾아서 떨리던 총칼
조국의 자유를 팔려는 원수
무찔러 나가자 인민유격대
“노래처럼/ 죽는 생애”를 살고자 했고, “붉은 깃발” 아래서 영원한 삶으로 기억되는 죽음을 죽고자 갈구했던 임화. 그러나 끝내 오욕과 삭제로 남아있는 그의 죽음은 우리 역사가 아직 애도하기에 이르지 못한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고은이 쓴 <임화>를 올려놓는다.
임화
아직껏 한국문학사에는 버려둔 무덤이 있다
마른 쑥대머리 무덤
그 무덤 벙어리 풀려 열리는 날
임화는 오리라
고아
식민지 중학교 2학년 중퇴
스무살에 카프 중앙위원
스물네살에 카프 서기장
시인 일류
비평가 일류
영화 <유랑> <혼가>주연 일류
혁명가는 차라리 삼류이거라
그러나 문학사 미술평론도 당시 일류
1953년 평양 사형 집행으로 그의 생애는
끝나지 않고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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