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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우리시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국물을 그만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 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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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과학> 2008년 가을호에 실린 이명원의 글에서 함민복의 산문시 [눈물은 왜 짠가]를 처음 접했다. 이명원은 공감 능력, '공감의 공동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이 시를 인용하고 있었다. 내게 이 시는 맑고 겸손한 영혼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요즘은 보기 힘든 유의 시로 읽혔다.

도무지 돈 벌 재주와 능력이라고는 없는, 지지리도 못난 자식인 ‘나’가, 가난한데다 병까지 드신 연로한 어머니를 고향으로 모시고 가는 길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들어간 식당에서 벌어진 일이 그려지고 있다. 오직 자식에 대한 걱정과 돌봄만이 몸과 마음에 밴 어머니의 행동과 그런 어머니 앞에서 죄송하고 미안하기만 한, 시 쓰는 것 말고는 다른 세속적 능력이 없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까지 드는 착한, 그저 착하기만 한 아들/‘나’의 마음. 여기까지만 그려지고 있다면, 애달프기는 하지만 상투적인 시로 그칠 수 있었다. 

그런데 식당 주인아저씨의 등장으로 이 시의 핵심이 전환되고 확대된다. 그의 사려 깊은 배려의 행위는 ‘나’로 하여금 억지로 참고 있었던 눈물을 기어이 “찔끔”, 하게 만들고 만다. 그 눈물을, 어머니 앞에서는 가려야 하는 그 눈물을, 이마에 흐른 땀으로 가장하면서 ‘눈물은 왜 짠가’를 속으로 중얼거리는 ‘나’. 무능한 자식들이 어머니 앞에서 느낄 수 있는 일반적 감정을 쑤욱 찌르는 시이면서, 무엇보다도 식당 주인아저씨의 형상을 통해 그 이상(以上)의 감정과 인식을 환기시킨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이것은 타인과의 관계 문제다.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하면서도 그저 안쓰럽게 지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가”오기. 요청에 실질적으로 응하면서도 개입하지 않고, 상대의 민망해할 마음까지 헤아려 “돌아서”기. 이런 식당 주인아저씨의 행위와 제스처는 동정심에서 나온 것일 수 없다. 그것은, 이들 가난한 모자의 가난한 사랑에 대한 깊은 공감과 존중에서 나올 수 있는 종류의 것이다.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수 있는 행위와 제스처를 통해 그것을 실감할 수 있게 만든 게 이 시의 진짜 힘이다.

사족: 이명원은 흔히 ‘감정이입’으로 옮겨지는 독일어 ‘Einfühlung’을 번역한 영어 ‘empathy’를 ‘공감’으로 옮기고, 그에 따른 논설을 이어가고 있다. 이건, 미학 개념의 차원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글의 내용은 소개할 만하다.


"이 아저씨와 시인 모두는 지금 일종의 공감적 상황 안에서 내적으로 연루되어 있거나 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공감(empathy)은 단순한 동정(sympathy)이 아닙니다. 그것은 동정이라거나 연민으로 항용 말해지는 감정이입의 상황을 인간에 대한 존엄과 환대와 같은 더 높은 정서적 감응상태로 고양시키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동정의 공동체' 안에서는 '''타자' 사이에 비대칭적인 정서의 주고받음, 그러니까 우열관계가 성립되지만 '공감의 공동체' 안에서는 내밀한 수평적 교류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공감능력이야말로 나와 타자 모두를, 단지 감각적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차원에서 낮은 곳으로부터 들어올리는, 이른바 초월적 고양감을 발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 편의 서정시라는 것의 출발점은 이런 공감능력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가령 시적 수사학의 기본이 되는 '은유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 '내 마음은 호수'라고 시인이 말할 때, (내 마음)와 타자(호수) 사이에는 평등한 연대감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게 시적 은유는 세상의 모든 타자들을 나와의 연대감 속에서 마술적으로 결합시키는 언어의 마술이자, 사유체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3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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