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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우리시

신경림, 산1번지

1番地

 


                             신경림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바람이 찾아 온다.

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

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

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

돌모래를 끼어얹는다.

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

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

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

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

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

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

연기가 붙어 흐늘댄다.

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

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

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

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

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

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

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

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

뒷산에 와 부딪쳐

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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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렇게 바랜 얼굴로 책장에 꽂혀있는 신경림(1936년 생)의 시집 <農舞>에 실려 있는 것을 옮긴다. 이 시집은 1973년 ‘月刊文學社’에서 처음 출간되었다가 1975년, 지금은 ‘창비’로 이름을 바꾼 ‘創作과批評社’에서 증보판으로 재간행되었다. 시집과 같은 제목의 시 ‘農舞’도 그렇지만 ‘山1番地’ 역시 당시 신경림 시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하나같이 절망적인 이야기를 간직한 밑바닥 인생들, 우리가 한때 ‘민중의 삶’이라 불렀던 그런 인생들이 한데 뒤엉켜 한 폭의 참담하고 막막한 풍경화를 연출한다. 그렇다고 끝없는 절망이나 증오, 분노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지는 않는데, 아마도 그의 시 전체를 감싸고 있는 연민의 정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착한’ 사람인 것 같다.

    ‘산1번지’는 지난 세기 6~70년대, 집 없는 이들이 비닐이나 판자로 집 지어 살았던 서울의 산비탈 곳곳을 가리키는 말도 되겠지만, 한때 시인이 살았던 ‘홍은동 1번지’이기도 할 것이다. 김관식을 중심으로 이규헌, 백시걸, 신경림 등이 무허가로 집을 짓고 살았던 홍은동 1번지. 시유지여서 번호가 없어 사람들이 멋대로 이렇게 번지수를 매겼다 한다.

    신경림 개인은 ‘산1번지’ 인생에서 벗어난 지 오래고 지금은 원로시인이자 동국대 석좌교수로 대접받는 ‘온후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산1번지’ 자체가 없어진 건 아니다. 그곳에 살았던 인생들은 철거되고 밀려나고 또 지워져 눈앞에 보이지 않도록 ‘정리’되었지만, 도시 전체 곳곳에 산개(散開)된 채 불쑥불쑥 무력한 절규를 토해내는 21세기 ‘산1번지’ 인생들은 더 참담한 풍경이 아닐까. 이 시대의 '산1번지'를 새롭게, 생생하게 '가시화'할 시인이 기다려진다. 70년대 신경림의 시가 백석의 한층 더 '민중화된' 계승이듯이 그렇게 신경림을 계승하는 시인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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