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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우리시

고은,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자작나무 숲으로 가서

                     

 

광혜원 이월마을에서 칠현산 기슭에 이르기 전에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발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도 없게 자작나무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 그렇구나 겨울나무들만이 타락을 모른다

 

슬픔에는 거짓이 없다 어찌 삶으로 울지 않은 사람이 있겠느냐

오래오래 우리나라 여자야말로 울음이었다 스스로 달래어온 울음이었다

자작나무는 저희들끼리건만 찾아든 나까지 하나가 된다

누구나 다 여기 오지 못해도 여기에 온 것이나 다름없이

자작나무는 오지 못한 사람 하나하나와도 함께인 양 아름답다

  

나는 나무와 나뭇가지와 깊은 하늘 속의 우듬지의 떨림을 보며

나 자신에게도 세상에서 우쭐해서 나뭇짐 지게 무겁게 지고 싶었다

아니 이런 추운 곳의 적막으로 태어나는 눈엽이나

삼거리 술집의 삶은 고기처럼 순하고 싶었다

너무나 교조적인 삶이었으므로 미풍에 대해서도 사나웠으므로

               

얼마만이냐 이런 곳이야말로 우리에게 십여 년 만에 강렬한 곳이다

강렬한 이 경건성! 이것은 나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온 세상을 향해 말하는 것을 내 벅찬 가슴은 벌써 알고 있다

사람들도 자기가 모든 낱낱 중의 하나임을 깨달을 때가 온다

나는 어린 시절에 이미 늙어버렸다. 여기 와서 나는 또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이제 나는 자작나무의 천부적인 겨울과 함께

깨물어 먹고 싶은 어여쁨에 들떠 남의 어린 외동으로 자라난다

 

나는 광혜원으로 내려가는 길을 등지고 삭풍의 칠현산 험한 길로 서슴없이 지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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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강한 힘이 있는 시다. <조국의 별>(1984)에 수록된 시로, 시인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시라 한다. 시가 마구 몸에서 튀어나오듯 엄청난 양의 시를 오랜 시간 간단없이 써왔던 천생(天生) 시인, 고은. 한때는 ‘시인다운 기행’이라고 허용 받고 인정받았던 행동이, 세상이 바뀌자 ‘성추행’이 되었고, 그는 졸지에 ‘늙고 추한 괴물’로 둔갑 당해버렸다. 일각에서는 ‘민족시인’이라고까지 높여졌던 그가, 단 몇 마디 원한어린 말로 하루아침에 조롱거리가 되고 마는 세상. “밤길 먼 불빛이 내 힘이었다/ 그것으로/ 어제와 오늘 내일이여”(「먼 불빛」)라는 시가 그의 삶 상당부분에 적중한다고 말해도 별로 거리낄 게 없을 그가, 그런 삶을 살았고 그런 언어를 쌓아왔다고 자부했을 그가, 이리 가볍게 ‘박살’날 수 있다는 것이, 그런 세상이 경악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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