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난 알고 있다, 단지 운이 좋아서
그 많은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을. 그런데 오늘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날 두고 하는 말을 들었다. “더 강한 자들이 살아남는다.”
그러자 내가 미웠다.
Ich, der Überlebende
Ich weiß natürlich: einzig durch Glück
Habe ich so viele Freunde überlebt. Aber heute nacht im Traum
Hörte ich diese Freunde von mir sagen: "Die Stärkeren überleben."
Und ich haßte mich.
브레히트가 1942년 초에 쓴 시다. 이 시의 원제는 <나, 살아남은 자>인데, 우리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김광규 시인의 번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80년대 “불의 시대”를 거치면서 이 땅에서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고, 고문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군대에 끌려가고, 정신이상이 되고, 불구가 되었다. 그런 지옥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쓴 이른바 ‘후일담’ 문학이 유행한 적이 있었고, 이 시도 그때 같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단 4행으로 된 짧은 시이고 평이한 시로 보이지만, 마지막 행 “그러자 내가 미웠다”에서 갑자기 의문이 생기는 시이다. 왜 내가 미워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1행에서 ‘내가 아는 것’과 2~3행에서 ‘꿈속에서 들은 말’이 다르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꿈속에서 말하는 친구들은 누구일까? ‘아는’ 의식 차원의 ‘나’와는 ‘다른 나’, ‘무의식의 나’는 아닐까? 그 ‘나’는 나치의 박해와 전쟁에서(또는, 스탈린의 대숙청에서? 그런데 브레히트는 스탈린의 대숙청을 긍정하지 않았던가?) 내가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더 강해서’라고 말하지 않는가? 나의 생존의 이유를 나 자신의 힘으로 돌리는 ‘나’. 그렇다면 ‘살아남지 못한 친구들’은 그들이 ‘덜 강해서' 살아남지 못했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무의식에서라도 일어나는 ‘나’라면, 그런 ‘나’는 증오해야 할 대상이 아닐까? ‘부끄러움’이나 ‘슬픔’이 아니라, ‘미워한다/증오한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 “hassen”을 썼기 때문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도 재고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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