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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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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또 문 밖에 나가지도 않고 자리에 누워서,머리에 손깍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내 가슴이 꽉 메..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
백석, 수라 수라修羅 거미 새끼 하나 방바닥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적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소주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백석이 193..
임화, 9월 12일 九月 十二日 一九四五年, 또 다시 네거리에서 조선 근로자의 위대한 首領의 연설이 유행가처럼 흘러나오는 마이크를 높이 달고 부끄러운 나의 생애의 쓰라린 기억이 鋪石마다 널린 서울ㅅ거리는 비에 젖어 아득한 산도 가차운 들窓도 眩氣로워 바라볼 수 없는 鐘路ㅅ거리 저 사람의 이름 부르며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개아미 마냥 뫄여드는 千萬의 사람 어데선가 외로이 죽은 나의 누이의 얼굴 찬 獄房에 숨지운 그리운 동무의 모습 모두 다 살아오는 날 그 밑에 전사하리라 노래부르는 旗ㅅ발 자꾸만 바라보며 자랑도 재물도 없는 두 아이와 가난한 안해여 가을비 차거운 길가에 노래처럼 죽는 생애의 마지막을 그리워 눈물짓는 한 사람을 위하여 원컨대 용기이어라. ---------------------- 임화, 본명은 林仁植, 19..
함민복, 눈물은 왜 짠가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둬라”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 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신경림, 산1번지 山1番地 신경림 해가 지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바람이 찾아 온다.집집마다 지붕으로 덮은 루핑을 날리고문을 바른 신문지를 찢고불행한 사람들의 얼굴에돌모래를 끼어얹는다.해가 지면 산 일번지에는 청솔가지 타는 연기가 깔린다.나라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내들은서로 속이고 목을 조르고 마침내는칼을 들고 피를 흘리는데정거장을 향해 비탈길을 굴러가는가난이 싫어진 아낙네의 치맛자락에연기가 붙어 흐늘댄다.어둠이 내리기 전에 산 일번지에는통곡이 온다. 모두 함께죽어버리자고 복어알을 구해 온어버이는 술이 취해 뉘우치고애비 없는 애를 밴 처녀는산벼랑을 찾아가 몸을 던진다.그리하여 산 일번지에 밤이 오면대밋벌을 거쳐 온 강바람은뒷산에 와 부딪쳐모든 사람들의 울음이 되어 쏟아진다. (1970)-------------- 누렇게 바랜 ..
김지하, 1974년 1월 1974년 1월 김지하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좁고 추운 네 가슴에 얼어붙은 피가 터져따스하게 이제 막 흐르기 시작하던그 시간다시 쳐온 눈보라를 죽음이라 부르자모두들 끌려가고 서투른 너 홀로 뒤에 남긴 채먼 바다로 나만이 몸을 숨긴 날낯선 술집 벽 흐린 거울 조각 속에서어두운 시대의 예리한 비수를등에 꽂은 초라한 한 사내의겁먹은 얼굴그 지친 주름살을 죽음이라 부르자그토록 어렵게사랑을 시작했던 날찬바람 속에 너의 손을 처음으로 잡았던 날두려움을 넘어너의 얼굴을 처음으로 처음으로바라보던 날 그날그날 너와의 헤어짐을 죽음이라 부르자바람 찬 저 거리에도언젠가는 돌아올 봄날의 하늬 꽃샘을 뚫고나올 꽃들의 잎새들의언젠가는 터져나올 그 함성을..